우선순위는 순서가 아니라 포기 목록이다
순위표는 결정이 아니다. 안 할 일 목록과 근거, 용량, 재논의 조건이 같이 적혀야 우선순위 회의가 매번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특정 조직의 문서는 아니다. 실무자로 앉아 있던 자리와 결정하는 자리에서 같은 장면을 반복해 본 뒤, 회사 이름을 걷어내고 구조만 남겼다.
우선순위 회의는 결론이 나도 끝나지 않는다. 몇 주 뒤 같은 안건이 다시 올라오고, 회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한 번이면 사고고, 분기마다 반복되면 구조다. 그리고 이건 대부분의 조직에서 구조다.
흔한 처방은 프레임워크를 바꾸는 것이다. RICE를 쓰든 ICE를 쓰든 MoSCoW를 쓰든, 점수가 나오는 순간까지는 잘 굴러간다. 그리고 점수가 나온 다음부터 다시 싸운다. 도구가 나쁜 게 아니라 도구가 푸는 문제가 우리 문제가 아니어서다. 프레임워크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계산해 준다. 조직이 실제로 막히는 자리는 거기가 아니다. **'덜 중요하다고 판정된 것을 진짜로 안 할 수 있는가'**다.
지금 쓰고 있는 우선순위 문서를 열고 세 가지를 확인해 보면 된다.
- 이번 분기에 하지 않기로 한 것이 이름으로 적혀 있는가
- 그 결정을 누가 언제 내렸고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남아 있는가
- 무엇이 달라지면 그 결정을 다시 논의하는가
셋 다 답이 없으면 그건 우선순위가 아니라 희망 목록이다. 희망 목록은 매번 다시 읽어야 하고, 다시 읽으면 매번 다시 싸우게 된다.
0. 순위표는 결정이 아니다
1위부터 20위까지 매긴 표를 놓고 참석자 전원이 동의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20위를 안 한다는 데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순서에는 동의했고 절단에는 동의한 적이 없다.
순서를 매기는 것과 자르는 것은 다른 행위다. 순서는 합의가 쉽다. 내 것이 3위라도 목록 안에 있으니 진 게 아니다. 절단은 어렵다. 누군가의 반기가 통째로 사라진다. 회의는 쉬운 쪽에서 자연스럽게 끝나고, 어려운 쪽은 결론 없이 다음 회의로 넘어간다.
우선순위 문서의 첫 장은 할 일 목록이 아니라 안 할 일 목록이어야 한다.
그래서 순위표에 선을 긋는 일부터 한다. 선 위는 이번에 하는 것, 선 아래는 '나중에'가 아니라 '이번엔 안 한다'. 이 구분이 전부다.
'나중에'는 우선순위 회의에서 가장 비싼 단어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대신 그 항목은 대기열에 살아남아 다음 회의마다 다시 심사를 받는다. 백로그가 길수록 회의가 길어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안 자른 것들이 매번 돌아와 다시 발언권을 요구한다.
1. 매번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지난 결정이 남아 있지 않아서다
결정은 분명히 내려졌다. 그런데 문서에 남는 건 결론 한 줄이다. "A를 먼저 하기로 함."
몇 주 뒤 누군가 묻는다. "그때 왜 A였죠?" 아무도 정확히 답하지 못한다. 그 순간 회의는 결정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결정을 다시 내리는 자리로 바뀐다. 재논의가 아니라 재판이다.
남겨야 하는 건 결론이 아니라 결론을 만든 근거와 그때 버린 대안이다.
| 재논의가 도는 기록 | 재논의가 끝나는 기록 |
|---|---|
| A를 먼저 한다 | A를 먼저 한다. B와 C는 이번 분기에 안 한다 |
| (근거 없음) | 근거: 이탈이 가장 큰 구간이 A였다 |
| (판정자 없음) | 판정: OOO, 8월 12일 |
| (재검토 조건 없음) | 해당 구간 이탈이 안 줄면 10월에 다시 본다 |
오른쪽 기록이 있으면 다음 회의의 첫 질문이 달라진다. "왜 A였죠"가 아니라 **"A를 정한 근거가 지금도 유효한가요"**로 시작한다. 앞엣것은 두 시간이 걸리고 뒤엣것은 10분이면 끝난다.
덧붙이면, 버린 대안을 적는 것이 채택안을 적는 것보다 값이 크다. 조직이 잊는 것은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이미 검토하고 버렸는지다. 그래서 반년마다 같은 아이디어가 새 아이디어의 얼굴로 돌아온다.
2. 근거의 종류를 먼저 합의한다
회의가 길어지는 두 번째 이유는 사람마다 다른 종류의 근거를 들고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매출 추정치를 가져오고, 한 사람은 고객 인터뷰 인용을 가져오고, 한 사람은 경쟁사 릴리스 노트를 가져오고, 한 사람은 "대표님이 이거 계속 물어보십니다"를 가져온다. 넷 다 진짜 근거다. 그런데 서로 비교가 안 된다.
이건 우선순위 싸움이 아니라 근거의 환율 싸움이다. 환율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결국 목소리 크기와 직급이 환율 노릇을 한다. 매번.
그래서 순위를 매기기 전에, 이번 분기에 무엇을 더 센 근거로 칠지를 먼저 못박는다. 예를 들면 이런 순서다.
- 실측된 구간 통과율과 이탈률
- 이탈 원인에 대한 정성 데이터
- 매출 기여 추정
- 경쟁 대응 및 그 외
어떤 순서를 고르느냐보다 순서가 회의 시작 전에 정해져 있느냐가 중요하다. 회의 중에 정하면 그건 이미 각자 결론을 들고 온 뒤라 근거 순서 자체가 협상 대상이 된다.
한 가지 덧붙이면, '대표님 관심'을 목록에서 지우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근거의 한 종류로 이름을 붙여 목록에 올린다. 그건 실제로 조직에서 작동하는 힘이고, 숨어서 작동하는 것보다 이름이 붙어 몇 번째 근거인지 명시되는 편이 훨씬 낫다. 이름이 붙은 근거는 반박할 수 있다.
3. 순서보다 용량을 먼저 고정한다
순위가 있어도 용량이 없으면 결국 전부 P1이 된다.
순서 논쟁의 상당수는 실제로는 용량 논쟁이다. "이것도 해야 하지 않나요"는 "지금 하는 것들 사이에 하나 더 들어갈 자리가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가 숫자로 놓여 있지 않으니, 용량 문제가 매번 순서 문제의 얼굴로 회의에 올라온다.
그래서 순위를 매기기 전에 동시에 몇 개까지 여는지를 먼저 못박는다. 그 숫자가 있으면 회의의 질문이 통째로 바뀐다.
| 용량이 없을 때 | 용량이 있을 때 |
|---|---|
| 이것도 중요하지 않나요 | 이걸 열려면 열린 셋 중 뭘 닫을까요 |
| 리소스 되면 하죠 | 지금은 자리가 없습니다. 언제 하나가 닫히나요 |
| 병렬로 조금씩 진행하면 되죠 | 넷을 반씩 하면 이번 분기에 닫히는 건 0개입니다 |
핵심은 이것이다. 추가는 무료지만 교체는 유료다. 우선순위가 실제로 작동하는 조직은 판단력이 뛰어난 조직이 아니라, 추가에 교체와 같은 값을 매겨 둔 조직이다. 값이 붙으면 사람들은 알아서 덜 요구한다. 태도를 고치는 것보다 이 편이 확실하다.
4. 재논의 조건을 미리 적는다
결정에는 유통기한과 재개 조건이 있어야 한다.
조건이 없으면 재논의는 아무 때나, 누구나 열 수 있다. 그러면 우선순위는 결정된 상태가 아니라 상시 협상 상태가 되고, 협상 상태에서는 가장 자주 말하는 사람이 이긴다.
재논의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조건을 붙이는 것이다.
조건은 세 종류면 충분하다.
- 지표. "이 구간 이탈이 두 달 연속 안 줄면 다시 본다"
- 외부 사건. "가격 정책이 확정되면 다시 본다"
- 날짜. "분기 중간 점검에서 한 번 본다"
이걸 적어 두면 기대하지 않았던 부수 효과가 하나 생긴다. 지금 당장 다시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스스로 근거를 챙겨 온다. 조건이 명시돼 있으면 그냥 "다시 논의하고 싶습니다"로는 문이 안 열리기 때문이다. 회의의 입장료를 올리는 셈인데, 올린 만큼 회의가 짧아진다.
5. 위에서 할 일은 순위를 정해 주는 게 아니다
실무자일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위에서 우선순위를 안 정해 줘서 막힌다.
결정하는 자리에 앉아 보니 달랐다. 순위 자체는 대체로 실무가 훨씬 정확하게 알고 있다. 무엇이 고객을 막고 있는지, 무엇이 기술 부채인지, 무엇이 과대평가돼 있는지. 그건 화면을 매일 보는 사람이 안다. 위가 갖고 있는 건 더 나은 정보가 아니라 자를 권한과, 자른 뒤에 오는 것을 받아 낼 위치다.
그래서 그 자리의 실제 산출물은 순위표가 아니다. 자른 것을 방어해 주는 일이다.
무엇을 안 하기로 결정하고 3주가 지나면 반드시 옆 조직에서 "그거 왜 안 했어요"가 들어온다. 그때 그걸 실무자가 혼자 받으면 조직은 아주 빠르게 학습한다. 자르지 말고 전부 P1으로 두고 다 같이 늦는 편이 개인적으로 안전하다. 이 학습이 한 번 일어나면 이후 어떤 프레임워크를 도입해도 소용이 없다.
조직이 우선순위를 못 정하는 게 아니다. 자르는 일이 개인에게 위험해서 안 자르는 것이다.
그러니 위에서 할 일은 절단을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문서의 판정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근거 순서가 문서에 있고, 용량이 숫자로 있고, 판정자와 날짜가 적혀 있으면, 자른 것은 특정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합의된 기준의 결과가 된다. 이름이 자르면 원한이 남고, 기준이 자르면 기록이 남는다.
6. 회의에서 쓰는 말을 바꾼다
앞의 것들을 다 해 놔도, 말이 그대로면 회의는 그대로다.
| 결정을 미결로 되돌리는 말 | 결정으로 가는 말 |
|---|---|
| 이것도 중요한데요 | 이걸 넣으면 무엇을 뺄까요 |
| 일단 백로그에 넣어두죠 | 이번 분기엔 안 합니다. 다시 볼 조건은 이겁니다 |
| 그때 왜 그랬죠 | 그때 근거가 지금도 유효한가요 |
| 리소스 되면 하죠 | 지금 셋이 열려 있습니다. 무엇을 닫을까요 |
| 대표님이 관심 있으세요 | 그건 이번 분기 근거 순서에서 몇 번째인가요 |
왼쪽 말들은 전부 선의다. 악의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왼쪽 말이 한마디 나올 때마다 이미 결정된 것이 조용히 미결로 되돌아간다는 데 있다. 그리고 미결로 되돌아간 항목은 다음 회의의 안건이 된다.
이 구조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
근거 순서를 정해도 데이터가 없으면 여전히 의견으로 싸운다. "실측 통과율이 1순위"라고 써 놓고 실측값이 없으면, 그 자리를 결국 추정과 인상이 채운다. 계측이 우선순위에 선행한다.
절단선은 조직이 지킬 때만 절단선이다. "이번만 예외로"가 한 번 통과하면 그다음부터 선은 기준이 아니라 참고 자료가 된다. 예외를 아예 막을 수는 없으니, 예외를 예외로 기록하는 것까지가 최소한이다. 기록되지 않은 예외는 다음번의 기본값이 된다.
우선순위는 전략의 결과지 전략의 대체물이 아니다. 어디로 가는지가 없으면 근거의 순서 자체를 정할 수가 없다. 방향이 빈 조직에서 우선순위 회의가 유독 긴 이유가 이것이다. 순서를 논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번 전략을 즉석에서 다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조건을 너무 촘촘히 걸면 관료제가 된다. 시장이 매달 바뀌는 초기 조직에서는 재논의가 잦은 게 정상이다. 그때 필요한 건 더 단단한 조건이 아니라 더 짧은 주기다. 분기 단위 결정을 2주 단위로 바꾸면, 재논의는 규칙 위반이 아니라 일정이 된다.
남긴 다섯 가지
- 우선순위 문서의 첫 장은 안 할 일 목록이다. 순서를 매긴 것과 자른 것은 다른 행위다.
- 결론이 아니라 근거와 버린 대안과 판정자와 재검토 조건을 남긴다. 그래야 다음 회의가 "왜 그랬죠"가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가요"로 시작한다.
- 근거의 순서를 회의 전에 정한다. 안 정하면 직급이 환율이 된다.
- 순서보다 용량을 먼저 고정한다. 추가가 교체와 같은 값이 되도록.
- 자르는 위험을 개인이 지면 아무도 안 자른다. 위에서 할 일은 순위 결정이 아니라 절단의 방어다.
우선순위 회의가 매번 처음부터 시작된다면, 그건 참석자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지난번에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서를 매긴 것은 결정이 아니다. 무엇을 안 하는지, 누가 그렇게 정했는지, 무엇이 바뀌면 다시 보는지가 같이 적혔을 때 비로소 결정이 된다. 그게 없으면 다음 회의는 회의가 아니라 재심이다. 매번 같은 사건을, 매번 같은 증거로, 매번 처음부터.